나만의 공간,
삶을 담는 인생 설계

조성익 홍익대학교 교수

※ 에디터의 말

“공간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 나를 담고, 나를 빚고, 나를 기억하게 만드는 그릇입니다.”

조성익 교수는 공간을 바라보는 건축가의 시선을 우리 삶의 가장 내밀한 부분과 연결하여 풀어냅니다.
그는 강연을 통해 삶의 변화와 감각, 그리고 기억이 어떻게 공간이라는 그릇에 켜켜이 깃드는지를 설명하며, 건축이 결코 전문가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역설합니다. 도시의 풍경 하나, 방의 구조 하나,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의 시선까지.
공간은 결국 그곳에 사는 사람을 닮아가고, 사람은 다시 공간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게 된다는 깊은 통찰을 이 글에서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1. 공간,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자 빚어내는 틀

공간은 수동적인 배경이 아니라, 우리 삶에 개입하는 능동적인 주체입니다.
우리가 공간을 만들지만, 결국 그 공간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다시 빚어냅니다. 무채색의 미니멀한 공간에 오래 머물면 우리의 사고방식 역시 간결함을 지향하게 되고, 따스한 조명과 나무로 채워진 공간에선 마음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제가 학교를 설계할 때,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은 그곳에서 뛰어놀 아이들의 눈높이입니다.
어른의 시선에서 멋진 통창이 아니라, 아이들이 창턱에 걸터앉아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창문을 낮게 냅니다.
벽의 일부는 거대한 캔버스처럼 비워두어 아이들이 마음껏 상상을 펼치도록 유도합니다. 건물은 단순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삶과 성격을 담아내는 살아있는 그릇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진 : TRU 건축사 사무소

2. 디지털 시대, ‘물리적 자리’의 가치를 묻다

건축의 거장 루이스 칸은 “벽은 문을 상상하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간은 안과 밖을 나누고, 문을 통해 비로소 관계를 시작하게 만드는 ‘관계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이 무한히 확장된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경계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때문에 ‘내가 온전히 머무는 진짜 자리’의 감각은 오히려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 무게만큼의 존재감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저 역시 좁은 자취방에서 책상 위 작은 촛불 하나에 의지해 글을 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오직 내 주위만을 밝히던 그 희미한 불빛의 영역이, 세상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감각을 선명하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디지털의 무중력 상태일수록, 우리 영혼을 붙잡아 줄 이런 물리적 앵커(Anchor)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3. 도시의 기억, 골목의 풍경 속에 머물다

도시는 건물이 아니라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울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에서 수십 년 전의 풍경을 기억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은 골목 하나, 오래된 가게 하나가 있다면 그 도시의 시간과 냄새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종로 낙원상가 인근의 한 국수집을 지날 때마다, 대학 시절 연극을 보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그 길을 걷던 제 모습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곳은 더 이상 단순한 식당이 아닙니다. 저의 20대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한 ‘시간의 풍경’ 그 자체입니다.
좋은 건축, 좋은 공간은 이처럼 사람의 기억을 붙잡아두는 힘을 가집니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그때 무슨 꿈을 꾸었는지. 공간은 기억을 담아두는 구조물이며, 그 축적된 기억의 힘이 다시 우리를 그 장소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4. 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공간

훌륭한 공간은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삶의 변화와 함께 호흡하는 유기체와 같습니다.
혼자일 때는 작은 원룸으로 충분했지만, 가족이 생기고 아이가 자라면서 집 안의 모든 공간은 새로운 의미와 기능을 요구받습니다.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필요해지고, 부모님의 노년을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찾아옵니다.

최근 아버지를 위해 집을 고친 경험은 제게 건축의 본질을 다시금 깨닫게 했습니다. 휠체어가 편히 다닐 수 있도록 모든 문턱을 없애는 작은 변화만으로도 아버지의 삶의 질과 동선은 극적으로 달라졌습니다. 건축은 벽돌을 쌓아 올리는 기술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의 삶을 헤아리는 ‘배려의 행위’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온몸으로 체감한 순간이었습니다.

5. 지금, 당신의 삶을 위한 건축을 시작할 시간

오늘,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이 머무는 공간은 어떤 기억을 품고 있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쌓아가길 원하십니까?

저는 요즘 다시 스케치북을 꺼내 들고, 제 삶의 다음 장면을 담을 공간을 그려보곤 합니다. 거창한 설계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을 식탁의 모양, 책상 모서리에 스며들 햇살의 각도, 침대 머리맡을 비출 조명의 온기 같은 아주 작은 상상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작은 그림 하나가 당신의 하루를, 그리고 당신의 내일을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가 되어가는 중입니다.